INFOMATION

ARTIST STATEMENT

2015 19번째 이철규  개인전

다섯 번째 금이야기. . . .금(金) 탐욕의 상징을 자연-상생으로 치유하다.

-최근 4년간 나의 작품에 눈에 띄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금과 한지의 결합’이 그것이다. 한국화가가 한지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금분을 활용한 금색이 아닌 금 자체를 작품에 직접 사용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는 개금기술과 금박기술을 나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금(金)은 영원불멸의 소중한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황금빛은 악마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기능과 함께 숭배의 의미 역시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금은 부(富)와 탐욕의 상징으로서 황금만능주의를 대표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서 금이라는 재료는 그 매체(媒體, media)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양면(兩面)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또한 금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시공간적 거리를 좁힌다는 것은 발화자와 수신자 사이의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조성하는 것과 자연과 인간과의 소통, 즉 물질과 자연과의 조화를 바로 ‘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구현하려 하고 있다.

나의 개금작업은 황금만능주의의 대표적 상징인 금(金, Gold)이라는 ‘물질적인 것’과 민화에 나오는 자연과 하나 되는 아이콘들 즉 ‘정신적인 것’을 화면에 상징적으로 배치하여 부자와 빈자, 자연과 인간, 음과 양, 평면과 입체, 구상과 추상 등의 조화로운 합(合,Unity), 즉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상생(相生, Living Together)의 장을 구현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금’이라는 매체가 본인과 세계인 자연과 대상, 즉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상생(相生)의 관계’, ‘공존의 관계’라는 깨달음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媒介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관점과는 달리 일반적인 사람들의 관점은 금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부의 상징으로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탐욕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전시는 나의 금 작업의 결과물들을 인간의 살아가고 있는 삶터, 아니 부축적의 대상으로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도시재개발구역에 위치한 빈집에 설치하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채움을, 텅 비어있는 가옥-비움과 함께 대조를 이루도록 하여, 금(金)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탐욕성을 치유해 보고자하는 조그마한 시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도시 재개발로 땅과 집을 수용당해 텅 비어있는 개발 예정지구를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도시개발 사업은 토지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도시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시행되는 사업이지만 재개발이 녹색 창연한 녹지공간과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한다는 장밋빛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재개발 사업의 이면에는 항상 높은 개발이익을 염두에 둔 기대심리가 작용한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재개발이 되면 무언가 한 몫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 말이다.

결국은 황금만능주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심리로 인해 수용당하거나 보상받고 버려진 원주민들의 빈집들을 보면 그 기대심리란 허울 좋은 빈 강정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거주자와 개발 주체와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개발 주체가 막대한 이익을 얻는 반면에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던 거주자는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거세게 반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짜여 진다.

개발의 시대였던 1970년대에 큰 이슈였던 소설가 조세희가 쓴 난쟁이 가족이의 삶을 통해 빈부의 격차와 갈등, 그리고 노사의 대립이 화해불가능하게 된 과정을 과감 없이 치밀하게 제시하였던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정확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냥 나만이, 우리 집만 가난한 줄 알았지 우리 부모가 무능해서라거나 복이 없거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난쏘공”의 작가는 우리시대의 중심은 바로 탐욕스런 자본가와 사회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노동자가 같이 맞서 있는 곳, 그곳에서 두 계급 간의 화해 불가능한 대립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난한 소외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모든 악의 근원을 자본가의 탐욕으로 설정했다는 점, 노동자의 모든 행위는 단지 수탈의 대상이었기에 정당하고 또 영원히 소유란 불가능하므로 여전히 정당할 것이라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19780년 식 개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상생을 하기위해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하며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배금주의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단일 목적으로 이득만 취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도시는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안정과는 거리가 멀고, 사람의 다양한 활동과 생활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단점이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개발을 위해 땅과 집을 팔고 텅 비어있는 빈집들에 나의 황금 빛 작품들을 설치하여 인간의  배금주의 즉 탐욕의 상징을 자연-상생으로 치유해 보자는 조그마한 몸부림이며 즉 함께 동행해보자는 이야기를 걸고 있다.(2015 .7. 이철규)